나는 계속 꿈을 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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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데프트가 누군지 고민하곤 했다.
그의 진짜 모습은 과연 무엇인지 말이다.
나와 데프트는 다르다. 데프트라는 게이머는 내가 만들어낸,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프로게이머이다. 그는 기계 같은 존재다. 경기를 지거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나 자신에게 실망하는 순간에, 나는 데프트가 되어 나 자신을 한계까지 내몰아쳤다. 내 모든 시간을 끊임없는 연습으로 눌러채웠다. 프로 선수로 입문 후 어느새 쉬지 않고 연습하는 루틴은 나의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데프트라는 자아는 나의 삶을 지배하여,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이상 김혁규라는 사람이 아니라 데프트로 살아가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렸었다. 한때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과 사랑에 빠졌던 나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그 모습이 그리웠다. 감정을 느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나. 이유 없이 생각에 잠기기도, 먼 꿈을 꾸기도 하던 나. 데프트는 감정 없이 오직 결과만을 바라보는 치열한 게이머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데프트라는 정체성의 간극은 벌어져만 갔고, 그 사이에서 나는 메말라갔다. 그 시간들은 가끔 나에게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이번 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테니까.
그리고 더 덧붙이자면,
나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나는 내년에 돌아올 것이다.
이제 그 이유를 이제 말해주고 싶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인히비터 순간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의 커리어를 통틀어서 단 한번도 그런 순간은 경험한 적이 없었다. 유튜브에서 나오는 짧은 영상들을 통해 그런 상황을 본 적은 있지만, 그런 일이 나에게? 그것도 월즈 8강전에서? 그것도 EDG를 상대로?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허무한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던 생각은 단 하나, 나는 정말 안되는건가? 였다. 하지만 경기가 끝나고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그 순간이 나의 운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 적인 요소가 아니라 실력의 문제였고, 나의 실수였다. 그 깨달음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고, 거기서 오히려 힘을 얻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다음 경기에서 승리했다. 고백하자면, 그때 이후 나는 우리가 무엇이든 뚫고 올라갈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맞이한 나의 생일.
지난 10년간 나에게 생일이라는 날은 월즈에서 지고 난 후 혼자 방에서 보내는 날이었다. 하지만 이번 해에 나는 8강전 승리 후 뉴욕에서 동료들과 팬들의 축하 속에 생일을 보냈다. 무대 위에서 나를 응원해 주는 모든 사람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세상은 이렇게 넓고 크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하고.
그날 나는 무대 위에서 내 감정을 온전히 표현했다. 지난 몇 시즌 간 나와 데프트라는 자아의 거리가 좁혀지기는 했지만, 그 순간만큼 데프트와 김혁규라는 사람은 하나였다. 그 순간만큼은 나와 나의 팀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젠지를 상대로 한 4강전에서, 나는 우리 팀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다. 상대 전적이 좋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우리는 그 전과 달랐으니까. 물론, 젠지도 막강한 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란과 쵸비는 나의 오랜 팀메이트이자 친구였으니까.
애틀랜타에서 경기를 펼치며, 나는 이번 여정에 대해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이번 여정을 통해 나는 나의 과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있었다. 과거에 나의 실패들을 마주하던 순간에 나와 함께해 주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있는 것이었다.
선발전에서는 예전 킹존 시절 때 함께 했었던 라스칼과 커즈를 상대했고, 8강전에서는 예전에 함께했지만 같이 나아가지는 못했던 EDG 팀원들을 상대했고, 4강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젠지 팀원들을 상대했다. 그들 모두 한때 나의 여정을 함께했으나, 이제는 상대편으로 만나야 했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 또한 중요한 과정이라 생각되었다. 이 마음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펼쳐졌던 결승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결승전. 여러 감정들이 나를 휩쓸었다. 이 과정이 얼마나 특별한지, 얼마나 많은 극적인 순간들이 모여 나를 여기로 데려다주었는지, 또 이게 마지막이 된다면 나의 다음은 무엇인지. 내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는 했지만, 그 감정들을 굳이 피하려 하지도 않았다.
내가 결승 무대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2014년 시즌 삼성 블루 팀의 소속이었던 나는 삼성 화이트 팀 응원 차 결승전에 참여했었다. 4강에서 화이트 팀에게 3-0으로 진 후였다. 그 당시 아래에서 무대를 올려다보며 분함을 감출 수 없었던 나를 떠올렸다. 이제 나는 무대 위에서 T1 팀의 건너편에 앉아 팬들의 함성소리를 들으며 오프닝 세리머니를 보고 있었다. 내가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이제 내가 이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설 수 있는 날이 드디어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이 북받쳐 올랐지만 그것도 잠시, 게임에 집중해야 했다.
내 길고 긴 여정이 나의 가장 친구 친구인 민석이 앞에 데려다주었다. 케리아와 함께한 시간은 1년 남짓이었지만, 민석이는 내가 가장 아끼는 후배다. 2020년 함께 팀에 섰을 때 민석이는 나에게 습관처럼 얘기하곤 했다. 형을 위해서라도 월즈를 꼭 이겨야 해. 내가 그렇게 할 거야, 라고. 그랬던 친구를 이제 결승전에서 상대편으로 마주하다니.. 참 복잡 미묘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 둘 다 이날만을 꿈꾸며 달려왔다는 것을.
내가 꿈꿔왔던 시간이 조금 길겠지만 말이다.
결승전 5세트는 아마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기에.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이번 여정을 겪으며 얻게 된 특별한 스킬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질긴 생명력. 우리는 무너지기를 거부했다. 매 게임마다 우리는 다양한 상황을 뚫고 올라왔기에. 그런 우리를 T1이 흔들 수 없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잘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 하면 될 뿐이었다.
나는 내 팀원들에게 무한한 박수를 보낸다. 항상 빠르게 피드백을 수용하고, 매 경기 플레이를 발전해 나아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만큼의 속도로 성장하는 팀과 함께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우리 감독 코치진에게도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매 경기 후 승리픽, 그리고 상대팀과 우리팀이 준비했던 픽을 분석하는 속도는 정말 대단했다. 결승 5경기 전날 밤, 감독님이 나에게 바루스와 케이틀린을 나눠먹는 구도에 대해서 설명하셨다. 우리는 월즈 내내 케이틀린을 밴하며 블루팀에게 내어 줄 생각이 없었지만, 바루스라는 픽은 모든 경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기에 이 구도가 T1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내가 확신을 갖지 못하고 망설이자, 감독님은 내 눈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나를 믿어.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책임질게.”
그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감독님이 자신의 판단과 우리를 믿었듯, 우리도 우리를 믿었다. 매 경기 모두가 불가능을 논하며 우리가 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 마지막 경기는 우리가 맞서야 할 마지막 관문과도 같았다. 구마유시 선수가 바론 스틸을 했을 때, 나는 다시 생각했다. 나는 정말 우승을 할 수 없는 건가? 하지만 곧 이것은 운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도 다시 떠올렸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더한 상황도 뚫고 올라왔다. 나 자신에게 되뇌었다. 팀원들 모두 잠시 침묵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우리는 아직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큰 동요 없이 우리는 다시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분 후, 정신을 다시 차려보니 우리는 넥서스를 깨고 있었다.
경기는 끝나가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우리의 우승이 코앞이라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내가 여태까지 늘 해오던 게임, 늘 해오던 경기에서 늘 하던 것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넥서스가 터지는 동시에 관객석에서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고, 팀원들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내가 월즈 우승을 한 것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은 말로 형용하기 어렵다. 그저 정말 기쁨 그 자체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행복은 나의 지난 시절이 있었기에 훨씬 더 크고 값졌다. 나는 정말 오랫동안 그 순간을 꿈꿔왔고 그 순간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었다. 나 자신과 게임이 싫어지던 나날들, 나 자신을 극한으로 내몰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나는 그나마 지난 몇 년 사이에 나 자신에게 잠시의 휴식을 허락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저 사람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게임에 더 열정을 갖게 해주었다. 그렇게 수없는 실패와 아쉬움, 여러 우여곡절 끝에 나는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이었다. 힘들었던 지난 모든 순간들이 나를 그 승리의 무대로 이끌어주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 모든 순간들이 나를 월즈 우승자로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들 속에는 나의 가족과 팀원들, 코치진과 프론트분들이 있었다.
올해 초에 디알엑스로 돌아온 이유 중에 지금까지 몸담았던 팀 중에 안 좋은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해서 그 모습을 지우고 싶다고 했었다. 지금은 그 약속 이상을 지킨 것 같아서 좋다. 일 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같이 이겨낸 프론트분들에게도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나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팀원들에게도 다시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그들은 내가 부상과 기력저하로 힘들어할 때 그들은항상 나의 곁에 있었다. 내가 어떤 평가를 받던 그들은 나를 믿어주었다. 우승의 날 내가 받았던 모든 메시지들은 늘 그렇듯 나의 마음을 가득 채워주었다.
마지막으로, 나의 팬들에게도 감사함을 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잘할 때는 팬들의 응원이 가끔씩 부담처럼 느껴졌을 때가 있었다. 기대가 실망으로 이어질까 하는 걱정 때문에. 하지만 내가 바닥을 찍은 후에도 내 곁을 지켜주는 팬들의 응원과 격려를 받으며 나는 더더욱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이 여정을 함께 걷고 있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여정은 곧 그들의 여정이고, 그들의 여정이 나의 여정인 것처럼. 이번 우승이 그들을 자랑스럽게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이번 우승이 그들의 여정을 향한 하나의 응원이 되었으면 한다. 지금 겪고 있는 과정이 힘들고 지치더라도, 계속 나아갈 수 있기를. 나는 어려움 끝에 이루는 목표가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걸 경험했기에, 나의 팬들도 지금 무엇을 향하고 걸어가고 있던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이번 해에 나는 가장 재밌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오랫동안 찾고 있던 것.
마음의 평화,
그리고 나 자신을 찾았다.
그래서 이 감사한 마음을 안고 나는 팬들과 팀원들과 조금 더 행복한 시간을 더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는 내가 언젠가 단 하나의 후회도 없이 게임을 떠날 수 있을 것을 안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이 여정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러니 곧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Deft
-데프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