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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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지를 상대로 펼친 LCK 스프링 결승전의 4세트. 팀 전체가 코로나 감염으로 인한 증상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나만 신기하게도 몸이 괜찮았다. 나머지의 멤버들은 각자 자신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스플릿 결승전의 승부가 내려질 때까지 단 한 게임만 남은 상태. 이번만 이길 수 있다면, 우리는 스프링 시즌을 완벽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무려 18:0, 전승 우승으로. 곳곳에서 기침소리와 지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우린 우리가 목표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느낄 수 있었다.
오너 선수의 격려 섞인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한다. “한 게임만, 한 게임만 더 하고 우리 쉬자.”
우리 모두가, 팀 뿐만 아니라 단체 전체가, 결승까지 올라오기 위해 시즌의 매 순간 최선을 다했지만, 승리를 향한 마지막 길목에는 무력의 팀과 코로나가 함께 서 있었다.
“다른 게임과 똑같이. 우리가 하던 대로만 하면 돼.” 페이커 선수가 덧붙였다.
우리가 승리를 거둔 바로 그날, 나는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내가 걸었던 지난 나날들을 떠올렸다.
이 무대에서, 이 선수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팬들은 지금 경기를 치르는 선수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어쩌면 지금의 모습만 보고 우리는 쉬운 길을 걸어왔다고, 타고난 재능으로 큰 어려움 없이 여기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할까.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나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믿는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을 믿어왔다.
2019년 연습생 시절, 나는 팀에게 나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확인시켜주고 싶었다. 주전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했다. 낮 열두시에 일어나서 새벽 네 다섯시까지는 기본으로,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의 모든 시간을 게임에 몰두했다.
물론 그 시간은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프로게이머로써 다음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선, 그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한 들, 하루에 솔로 랭크에 할애하는 시간이 단 몇 시간이 아니라 12시간이 넘어간다면? 그것도 매일매일 한 달 동안? 나의 온 신경은 게임을 향해 있었다. 그래서 그날의 결과에 따라 내 기분도 들쭉날쭉하기 일쑤였다. 차디찬 새벽 공기를 마시러 잠깐의 휴식을 취하면서도 나는 내가 지금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 자신을 돌아보곤 했다.
사실 더 어릴 적에는, 프로게이머의 세상에 큰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저 게임이 좋았을 뿐. 그렇지만 꼬마 감독님 (김정균 전 SKT T1 감독) 으로부터 리크루트 제의를 받기 몇 년 전, 내가 한국 서버 TOP10안에 들게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혹 이것이 나의 삶이 되지 않을까. T1에 합류했을 때, 나는 이 세계에서 내가 이룰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다. 페이커 선수 나 테디 선수 같은 선수들을 보며, 나도 그들과 같은 경력과 경험을 쌓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지독하게 연습한 이유였다.
나는 내가 잘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마음먹은 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 아버지는 나에게 진지하게 최후의 통첩을 내리셨다. 한 달 안에 탑 티어를 등극하거나, 게임을 포기하고 공부에 열중하거나. 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형이 現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였기에, 부모님은 E스포츠의 세계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다. 일찍이 아버지는 내가 한계에 도전하고 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고 일깨워 주셨다.
그리고 한 달간의 접전 끝에, 난 챌린저에 등극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아버지는 나를 전적으로 믿어 주셨다.
어린 날 나의 그런 노력들이 내가 LCK에서 원딜 선수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주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2020년, 나는 조 마쉬에게 당당히 얘기했다. 나는 LCK에서 어떤 선수를 상대하던 이길 자신이 있다고. 물론 그 당시에 T1에는 훌륭한 선수들이 있었고, 팀에 합류한지 얼마 안 됐던 나는 주전으로서 나의 가능성을 팀에게 입증시켜줄 시간이 아직 부족했다. 그렇지만 조 마쉬와 팀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나는 빨리 경기에 출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혹독하게 훈련하며 나의 자리를 기다리는 동안, 한국에서 나의 실력과 성적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다른 팀들로부터 다양한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온 것이었다.
나는 당시, 다른 팀에 합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잠시 고민해 보기도 했었다.
가족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고, 다른 단체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확히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에 대해 오래 의논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다. 삼국지의 유비에 관한 일화이다. 유비는 어느 추운 가을날, 강가에서 한 노인을 만난다. “이 늙은 것이 어떻게 이 강을 건너란 말이냐? 네놈이라도 나를 업어 건네다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노인이 소리치자, 유비는 마지못해 그 노인을 업고 강을 건넌다. 그런데 아뿔싸, 강을 다 건넜을 즈음 늙은이는 보따리를 두고 왔다며 막무가내로 유비에게 자신을 다시 업으라 재촉하고, 유비는 끝까지 노인의 부탁을 들어준다. 둘이 보따리와 함께 강을 무사히 건넌 후, 노인은 유비에게 묻는다. “너는 어째서 두 번째로 나를 업고 건널 생각을 했느냐?”
그때, 유비의 답은 이러했다. “그것은 잃어버리는 것과 두 배로 늘어나는 차이 때문입니다. 제가 두 번째로 건너기를 마다하게 되면 첫 번째의 수고로움마저 값을 잃게 되지만 한 번 더 건너면 앞서의 수고로움도 두 배로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랬다. T1은 내가 첫 번째로 선택한 팀이었다.
아마추어 선수에서 프로의 세계의 입문할 때, 나에게 많은 선택지가 주어졌었다. 그중 다른 팀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처음으로 선택한 T1에 남기로 했다. 내 첫 번째 선택지에서 내가 들인 노력과 수고로움을 잃지 않기 위해, 팀에 남음으로써 나의 노력들이 배로 돌아오길 희망하며. T1에 남아 주전이 되는 것, 국내외 경기에서 팀과 함께 승리하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되었다.
어쩌면 그래서 작년 가을 아이슬란드 경기가 조금 쓰라렸는지도 모르겠다. 월드 챔피언십 준결승전에서 5세트를 기아 담원에게 내주는 것은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한편으로는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뻤지만, 팀 전체의 분위기는 패배로 인해 많이 다운되어 있었다. T1의 멤버라면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뜻이니까. 우리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도 누구 못지않게 승리를 기원했다.
작년 아이슬란드의 경기는, 어쩌면 이번 스프링 시즌의 발판이 되어주지 않았나 싶다. 팀은 그 경험을 통해 더 돈독해졌고, 더 좋은 팀워크로 경기에 임할 수 있었다. 작년에는 팀으로서 함께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의 팀을 바라보자면, 나는 우리가 하나로써 움직인다는 걸 더 확실히 느끼고, 그것이 우리의 최고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스플릿 결승전의 시작 전, 나도 우리가 18:0의 기록을 세울 수 있으리라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드는 생각은, 아마 그날의 경험은 먼 훗날에도 우리가 자랑스럽게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번 스프링 시즌을 더욱더 특별하게 만들어 준 것은 역시 T1의 팬들이다. 처음 시작했을 땐 나에게도 팬이 생겨 이런 성원과 응원을 받으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그들의 사랑은, 정말로 특별한 것이라고 느낀다.
나는 그 마음을 부산에서 꼭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미국에서 펼쳐질 월드 챔피언십에 대한 기대도 크다.
하지만 지금은 MSI에 집중할 때.
앞으로 우리가 해내어가야 할 것들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란 걸 나도 안다.
하지만 이곳을 향한 나의 여정은, 우리의 여정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여정을 끝낼 의무가 있다.
-구마유시